글-미국 교포사목 피닉스 주임
최병권 대건안드레아 신부

글-미국 교포사목 피닉스 주임 최병권 대건안드레아 신부

1996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날,  부산 부곡동의 신학교 면접실에서, 당시 입학 사정관 신부님들께선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최병권이, 니는 모하다 신학교에 왔노?”  신부님 앞에서 긴장으로 얼어붙은 마음에, 신부님이 물으신 이 물음 은 나를 더 얼어붙게 하였다.  “예, 저는 그동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를 마치고 다시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다니다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내 입에서만 맴돌았을 뿐, 어물어물하는 가운데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당시 입학 사정관 신부님들의 눈빛에 그만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해 신학교에 들어가 보니, 그 신부님들께선 너무나도 따뜻한 분들이셨다.

그리고 잊지 못할 신학교 1학년 영어 수업 첫 시간, 미국인 신부님이셨던 필립 마레 신부님은 칠판에 한 단어를 쓰셨다. ‘COMPASSION’, 이 말은 우리말로 옮기면 ‘연민’, ‘동정’이란 뜻이며, 좀 더 나아가 ‘고통을 함께한다’라는 뜻의 합성어라고 한다. 신부님께선, 여러분이 사제로서, 그리고 사제 이전에 한 사람의 진정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 이웃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덕목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신부님이 칠판에 쓰시며 하신 말씀의 기억이 생생하다. 과연 나는 지금 그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Untitled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본, 두 가지 영상이 마음 깊이 남는다. 첫 번째 영상은, 현직에서 은퇴하신 어떤 신부님께서 남미의 한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을 소개하는 영상인데, 어느 날 신부님이 한국에서 옷을 한 트럭 갖고 오셔서, 그곳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영상이었다. 신부님이 한국에서 옷을 갖고 오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사람이 모여, 기뻐하며 옷을 고르는데, 그중에 유독 눈길을, 아니 마음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한 흑인 소녀가 자신의 할머니인 듯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와, 그 할머니에게 옷을 입혀주는데, 짙은 꽃무늬 몸빼 바지에, 하얀 모시 저고리 같은 것을 골라 할머니에게 입혀 주는 모습이었다. 등이 굽을 대로 굽은 할머니에게 손녀 같은 소녀가 입혀주는 옷! 소녀는 할머니의 모시 저고리 단추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끼워 주고, 옷매무새도 단정하게 잡아 주었다. 할머니 난생처음 입어보는 호사스런 옷이 부끄러우면서도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자그마한 키에 굽은 등, 깊게 패인 얼굴과 팔의 주름은, 힘겹게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새 옷을 입고 기뻐하면서도 부끄러워하던, 그 등 굽은 할머니와 소녀는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부디 그러하길 ..... 사제관 한 곳에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빌어 본다.

두 번째 영상은 한국의 어느 한 훌륭한 의사분이, 필리핀에서 무료로 의료 봉사를 하는 영상이었다. 어느 날, 이 의사분께선 한 젊은 여인을 진료하는데, 곱게 생긴 얼굴에 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이 여성은, 그러나 불행히도 왼쪽 뺨이 혹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이 여인을 진료한 결과, 수술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혹을 떼어내고, 며칠간의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여인의 젊은 남편이 병원으로 찾아오는데, 그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였다. 돈이 없어서 수술도 시켜 주지 못한 아내의 모습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아내 역시 자신을 찾아온 남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뒤 남편은 어디론가 나가서 무언가를 사 오는데, 그것은 한국의 컵라면 같은 것이었다. 가난한 노동자인 그가 무언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사 온 것이 겨우 컵라면이었던 것이다. 그는 라면에 끓는 물을 부어 아내에게 수저로 떠먹이는데 아내는 수술로 부어오른 뺨이 아파 라면을 먹기 힘들었지만, 자신을 위한 남편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떠먹었다. 수술 부위의 아픔 때문이었는지, 눈물을 흘리며 겨우겨우 먹고 있었고, 떠주는 남편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그것을 보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Untitled

사제는, 아니 사제이기 이전에,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젠가 신학교 미국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우리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 그리고 동정이라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힘없고 약한,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지난 8월 8일 서울에 기록적인 비가 내리고 많은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가 났다고 한다. 그 가운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빌라, 반지하에서 희생된 일가족 세 명의 참사로, 40대 여성과 그가 돌보는 장애가 있는 여동생, 그리고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딸. 이렇게 셋이 갑자기 불어난 물이 반지하 방으로 들이닥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안타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잘 사는 사람은, 경관이 좋은 곳에 고급 저택을 짓고 사는 반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사는, 특히 한국의 경우, 햇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수십만에 이른다고 한다.

얼마 전 몇몇 교우 분들과 식사를 하며, 그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대부분의 사람이 말하길, ‘도와줘 봤자 그들에게 근본적인 도움도 되지 않고, 복지 재단에 기부를 해봐야 그 기부 금액은 대부분 재단 운영비로 쓰이니 할 필요가 없다.’는 냉소적인 말을 듣고 큰 실망을 하여 돌아온 적이 있다. 사람이 아닌 벽 앞에다 얘기하고 돌아온 듯한 답답함은,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만 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기다려 주시겠지 ...

하느님은 우리를 불러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는 것 같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 한없는 기다림 가운데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

살아가는 동안, 나는 무엇으로 그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까?

오래전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교수 신부님들 앞에 앉았을 때, 신부님께서 물으셨던 물음이 자주 생각난다.

“니는 모하다 신학교 왔노?”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아마도 하느님께선 내게 이렇게 물으시지 않으실까?

**“그래, 아들아,

너는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하다 왔니?”**

“그래, 아들아, 너는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하다 왔니?”